5년 전, 처음으로 대학 교수직을 맡아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으로 이사했습니다. 샬럿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처음 눈에 띈 것은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들이 유독 한 부류의 새 이주민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평범한 샬럿 주민들은 상당수가 자신도 이 도시에 온 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멕시코에서 온 외국인이 아니라 뉴욕에서 온 같은 미국인들에게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뉴욕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집값을 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샬럿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오스틴을 비롯한 선벨트 도시의 동료들에게 듣기로는 그런 반감이 더 심한 곳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다른 미국인들이 이사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토지 이용 규제 같은 간접적인 방법을 빼면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베서니 라시나의 Strangers and Settlers: Migration Politics in a Local’s World (Oxford University Press)는 이 현상을 잘 설명하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줍니다. 최근 읽은 책 중 아마 가장 통찰력 있는 책일 겁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오래된 질문에 명쾌하면서도 차분하게 답한다는 데 있습니다. 애초에 경계는 왜 존재할까요? 그리고 적어도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왜 나라 안보다 나라 사이에 그런 경계가 더 많을까요?
책의 핵심 주장이자 라시나가 자료로 입증하는 사실은 그곳 주민에게 특별한 권리가 있다는 사회 규범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 온 사람에게는 없는 권리입니다. 너무나 흔한 믿음이라 그곳 주민과 새로 온 사람 모두 이를 공유하는데도, 이주와 지역 정치를 다룬 대부분의 논의는 거의 주목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시민에게 특별한 혜택이 있는지,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중 얼마가 사익이나 인종차별 때문인지를 두고 논쟁합니다. 라시나는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40년에 걸쳐 축적된 설문조사와 인구총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국내 이주와 국제 이주를 나란히 살펴보며 이 논쟁을 비켜 갑니다. 비교 관점에서 이민 정치를 다룬 책이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주택 정책을 분석하는 사람들과 주택 공급 확대를 지지하는 YIMBY 운동의 활동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정직한 민족주의자가 필요할 때 그들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가 될 수 있는지입니다. 라시나의 표현으로 고전적 민족주의자인 이들은 외국인보다 자국민을 우선하면서 모든 자국민을 똑같이 대합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동네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그곳에 이미 자리 잡은 사람을 우선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민 정치와 주택 정치의 상당 부분은 누구를 그곳 사람으로 보고 그 지위에 어떤 권리를 부여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서평이자 제 나름의 생각을 담은 이 글에서는 국경과 시민권에서 출발해 두 가지 질문까지 이 생각을 따라가 봅니다. 인종적 편견은 왜 많은 학자들이 가정하는 것보다 설명력이 약할까요? 그리고 같은 나라 국민이 이사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주민들은 왜 토지 이용 규제에 기대는 걸까요? 끝으로 라시나와 제 견해가 가장 크게 갈리는 질문을 다룹니다.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나라일까요, 아니면 더 가까운 지역 공동체일까요?
로체스터대학교 정치학자 베서니 라시나는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자국민을 우선하는 배외주의와 민족 갈등을 여러 해 연구한 끝에 이 책을 썼습니다. 최근 설명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이민 논의가 여러 면에서 시야가 좁아 답답했다고 합니다. 미국과 유럽 밖에서 발견한 양상이 산업화된 나라들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라시나는 이민 관련 논평 대부분을 읽다 보면 이주 정치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그리고 지중해에서만 벌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책의 사례는 인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중국과 북아일랜드까지 아우릅니다. 미국의 주 정치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같은 나라 국민이라면 어디서나 같은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드뭅니다
라시나가 특히 못마땅해하는 것은 이민자의 후손이 이민에 반대하면 마치 미국에만 있는 위선인 양 놀라는 미국 논객들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은 조상이 이주하거나 정복한 곳에 특별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카메룬 남부의 베티족과 불루족부터 가계도에 위그노 난민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네덜란드 가족까지 그렇습니다.
한편 이민을 다룬 많은 글은 국가나 민족에 대한 정체성과 거기에 따른 여러 집단 편향만 없다면, 누구나 결국 정부가 먼저 살던 주민을 차별적으로 우대하는 데 반대하리라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국내 이주를 통제하거나 출신 지역에 따라 같은 나라 국민을 다르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그 근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라시나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채용 시 국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보다 그곳 주민을 우대하는 것이, 적어도 원론적인 질문에서는 해외에서 온 이민자보다 미국인을 우대하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라시나는 미국 밖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발견했습니다. 인도가 한 예입니다. 모든 언어 집단에서 과반수가 채용할 때 국내 이주민을 차별하는 데 찬성했습니다. 자기 집단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 가장 많은 주에서도, 자기 집단이 소수인 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시나는 한 나라 안에서 그곳 주민에게 특별한 권리를 주는 것이 흔한 일이며, 자국민에게 특별한 권리를 주는 것보다 논란이 적을 수도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라시나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 주민의 권리를 인정하는 규범은 민족주의보다 오래됐고, 민족주의에 설득력을 더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곳 주민이 아닌 곳에도 이 규범을 적용합니다.
라시나가 미국인에게 주 정부 장학금의 기준을 검토해 달라고 하자, 대개 자신이 살지 않는 주에서도 그 주 주민을 우대하라고 답했습니다. 라시나는 이를 지역 소속에 따르는 상호 의무로 봅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내가 먼저이고, 당신이 사는 곳에서는 당신이 먼저인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공립대가 다른 주 출신 학생에게 더 높은 등록금을 받는 것도 같은 생각을 일상에서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라시나의 보다 큰 주장은 반대 여론이 놀랄 만큼 강한 국외 이주에 관한 제 이전 연구와도 통합니다. 당시 연구는 많은 사람이 장소를 옮겨 다니는 일 자체를 꺼릴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라시나는 여기서 훨씬 더 나아갑니다. 책 끝부분에서 이주에 반대하는 마음보다 사람들이 이주하지 않는 데 얼마나 큰 가치를 두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왜 경계가 있을까요?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와 세계시민주의 철학자는 이주로 얻는 이익이 크고 이주 제한이 사람들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데 왜 경계가 존재하는지 자주 묻습니다. 예를 들어 2015년 경제학자 앨릭스 태버록은 The Atlantic에서 국경을 완전히 없애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국경을 개방하면 세계 GDP가 두 배가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국경 없는 세상”을 요구하는 활동가 하르샤 왈리아처럼 좌파 인사들은 보통 국경의 뿌리에 인종차별이 있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노동시장 보호와 집단 편향을 넘어 생각하면 지금의 경계는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라시나는 경계가 역사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부터 살핍니다. 경계는 정치적 폭력을 억제하고, 물리적 공간이나 공공 서비스 같은 지역 자원에 그곳 주민이 우선 접근할 권리를 지켜 주었습니다.1
라시나에 따르면 정권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할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정권에 맞서 조직을 만들거나 세금을 피하려고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고, 이동의 자유는 강제 노동 체제를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에는 그곳 주민의 특권을 자신이 부여하는 데서 얻는 이익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감시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부가 가구 등록 제도인 후커우의 용도를 바꿨습니다. 이동을 일률적으로 금지하던 제도가 사람들의 행적을 더 선별적으로 파악하는 수단이 됐습니다.2
이와 관련해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왜 국내의 경계를 넘는 것보다 국경을 넘는 것이 훨씬 어렵고, 대다수는 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라시나는 정치이론가 조지프 카렌스를 인용합니다. 카렌스는 1987년의 고전적인 국경 개방론에서, 대공황 때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오클라호마의 가난한 사람들이 오는 것을 막고 싶어 했고, 글을 쓸 당시 오리건 주민들은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유입을 막고 싶어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각 주가 경계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복지국가가 전국 단위로 운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설명이 됩니다. 국내에서 이사하는 시민은 이미 복지에 대한 권리가 있지만, 외국에서 온 사람은 새로 그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 안의 경계도 한때는 그렇게 작동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어느 지역에 정치적으로 속하느냐가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 징집될 수 있는지가 그에 따라 결정됐습니다. 빈민 구제와 그 밖의 공공 서비스를 국가가 전국 단위로 맡게 되자 국내에서 이주하는 데 따르는 장벽이 낮아졌습니다. 지역에 가난한 사람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누가 들어올 수 있는지 통제하는 중요한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라시나는 많은 부유한 나라에서 국내 이주가 정치적 논쟁거리가 아니게 된 네 가지 조건을 듭니다. 이주 수요가 적었고, 국내 감시가 광범위했으며, 국가의 재원 조달 방식이 바뀌었고, 공공재에 중앙정부가 재정을 댔습니다. 국제 이주에는 이에 견줄 변화가 없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여행비가 낮아졌는데도, 국제 이주 규모는 1960년대부터 국내 이주보다 약 90~95% 작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전적 민족주의자를 찾아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누구를 고전적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지 자주 논쟁합니다. 미국에서 ‘리버럴’이 큰 정부의 지지자를 뜻하게 되자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쓰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라시나는 이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고전적 민족주의자를 제시합니다. 이들은 외국인보다 자국민에게 특권을 주어야 한다고 믿지만 자국민끼리는 더 이상 구별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일관되게 자국민을 우선하고 모든 자국민을 똑같이 대합니다.
이민에 관한 많은 글은 대다수가 이런 고전적 민족주의자라고 전제합니다. 저 역시 최근에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첫 책에서 제시한 이타적 민족주의 이론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가정했습니다. 여러 정당도 이런 유권자를 찾고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이민에는 반대하면서 자국민에게 넉넉한 혜택을 제공하는 복지국가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이런 유권자가 실제로 있을까요?
라시나는 꽤 영리한 방식으로 고전적 민족주의자를 찾아봅니다. 실제로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 꽤 놀라웠습니다. 이민 반대를 재는 데 가장 흔히 쓰는 간접 지표 중 하나는 “일자리가 부족할 때 고용주는” 이민자보다 자국민을 “우선해야 한다”는 데 사람들이 동의하는지입니다. 세계가치관조사와 유럽가치관조사는 수십 년 동안 수십 개 나라에서 이 질문을 해 왔습니다. 라시나는 여기에 그곳 주민과 국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 중 누구를 우선할지 묻는 같은 형식의 문항을 짝지었습니다. 미국에서 직접 실시한 조사와, 동유럽과 남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두 질문을 함께 던진 유럽가치관조사의 특별 조사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라시나의 미국 조사에서 고전적 민족주의자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두 종류의 우대를 모두 거부한 세계시민주의자보다도 드물었고, 조사에 참여한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도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적어도 일부는 문항의 표현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일자리가 부족할 때”라는 같은 말로 시작하는 비슷한 두 문장에는 둘 다 동의하기가 더 쉬울 수 있으니까요. 같은 조사를 활용한 더 최근 논문에서 라시나는 대신 주 정부의 대학 장학금에서 자국민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미국 시민권자와 영주권자)과 그곳 주민(해당 주의 고등학교 졸업생)을 우대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서는 고전적 민족주의자가 세계시민주의자보다 확실히 많았지만 여전히 소수였습니다. 두 종류의 질문 모두에서 응답자의 뚜렷한 다수가 그곳 주민과 자국민 모두를 우대하는 데 찬성했습니다. 라시나가 더 중요하게 보는 대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유권자가 새로 온 사람에 대한 편견 없이도 자기 지위를 지키려는 이유
그렇다면 국적은 정체성이면서 동시에 지위입니다. 시민권은 그곳 사람이라는 지위가 국가 차원에서 나타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에 대한 태도를 연구하는 우리 중 다수는 국적을 주로 정체성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시민권이라는 지위에 그곳 주민을 우선하는 강한 규범이 더해진다면, 유권자는 새로 온 사람에게 어떤 반감도 없이 그 지위를 지키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라시나는 그곳 사람이라는 것 자체도 같은 방식으로 봅니다. 어느 정도는 정체성이지만 권리에 대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라시나의 정의는 최대한 간단합니다. 어떤 곳에서 특별한 혜택을 요구해 그 요구를 인정받은 사람이 그곳 주민입니다. 다른 주권자들이 인정해 주는 사람이 주권자인 것과 비슷합니다.
그곳 주민은 그곳이 주는 일부 혜택에 대해 외부인보다 자신들의 권리가 더 크다고 믿습니다. 또 누가 그곳 사람이고, 새로 온 이들이 그곳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는 자신들이 정할 일이라고 봅니다. 하나의 지위이므로 동네에서 국가까지 어느 범위에나 적용됩니다. 누군가를 싫어해야 성립하는 것도 아니지만 반감과 양립할 수는 있습니다. 책 제목에 쓰인 라시나의 용어로 말하면, 정착민은 흔히 무력을 등에 업고 누가 그곳 사람인지를 새로 정하는 질서를 세우려 합니다. 반면 외지인은 기존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곳 주민이 정한 조건에 따라서만 그곳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주민의 대다수는 이 의미에서 외지인입니다. 평소의 이주 정치는 주로 어떤 외지인을 어떤 조건으로 받아들일지를 놓고 그곳 주민끼리 다투는 일입니다. 이민 반대 담론이 그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새 이주민이 정착민처럼 행동해 기존 주민을 자기 땅에서 외지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지위에 주목하면 허가받지 않은 이주에 대중이 훨씬 더 분노하는 이유도 설명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어떤 조건으로 합류할지에 관한 기존 주민의 발언권을 건너뛰기 때문입니다. 이민에 대한 태도가 주로 집단 정체성의 문제라면 그 분노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민자와 그 후손은 대체로 나머지 인구보다 이민에 개방적입니다. 하지만 라시나의 지적처럼 이주를 지지하는 활동가와 정치인은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종종 과대평가합니다. 이민자와 소수집단의 견해가 집단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라시나의 미국 조사에서 이민자와 미국에서 태어난 라틴계·아시아계 미국인이 국내에서 그곳 주민을 우대하는 데 찬성한 비율은 다른 응답자와 거의 같았습니다. 이들 집단에서 인종 문제에 진보적인 응답자, 즉 적극적 우대 조치를 지지하는 사람은 인종 문제에 보수적인 사람보다 이민자에 앞서 미국인을 우대할 가능성이 오히려 조금 더 높았습니다. 라시나는 이를 이민자와 소수집단의 이민 제한 지지가 반드시 “내면화된 인종차별”의 징후는 아니라는 증거로 봅니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그곳 주민과 자국민을 우선하는 데 반대하는 엘리트주의적 세계시민주의는 드뭅니다. 그중 약 4분의 3은 고용주가 그곳 주민을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라시나는 그곳 주민의 권리가 민족주의나 인종차별보다 더 낫거나 덜 해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도 그의 자료를 보면 이민을 다룬 많은 글이 이주 반대에서 인종이나 국적에 따른 집단 편견이 하는 역할을 과장하는 듯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인 배외주의자들이 소수집단과 인종 문제에 진보적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곳 주민을 우대하는 규범이 우세할 수 있다는 것이 라시나의 주장입니다.
같은 나라 국민의 전입을 막을 수 없으면 동네의 주택 건설에 반대합니다
부유한 나라에서 국내 이주에 대한 반감은 관련 집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띤다고 라시나는 씁니다. 그중 하나가 자기 동네의 건설에 반대하는 님비(NIMBY) 현상입니다. 라시나는 정부가 누가 옮겨 오는지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이민 정치의 가정된 미래를 국내 이주 정치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미국에서 다른 지역에서 같은 나라 국민이 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주민은 주 경계를 닫아 달라고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경쟁자가 이사 오는 것을 막을 방법으로는 토지 이용 규제와 그 밖의 신규 주택 건설 제한이 남습니다.
새 주택에 반대하는 이유로 흔히 집값을 지키려는 소유주와 집 옆에서 공사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웃을 듭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를 보면 새 주택에 대한 집주인과 세입자의 견해는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반대 여부는 사람들이 주택 정책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개발업자와 새 주민을 어떻게 보느냐와 맞물립니다. 이민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처지는 놀랄 만큼 설명력이 작습니다. 라시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이미 사는 사람에게 누가 합류할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널리 퍼진 믿음은 님비의 반대 이유에 하나씩 답하기가 왜 어려운지도 보여 줍니다. 기존 주민은 새로 온 사람보다 자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공유합니다. 그래서 “이주와 그럴듯하게 연결할 수 있는 불만이라면 무엇이든 이주를 싫어할 이유가 된다”고 라시나는 말합니다. 새 아파트를 둘러싼 갈등이라면 교통 체증이나 동네 분위기가 그런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라시나에 따르면 정부가 기존 주민에게 이로운 이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 주민들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합니다.
지역 주민 우선 정책과 지역의 결정권에 관한 남은 질문
유권자가 그곳 주민을 우대하는 정책을 바란다면, 이주민과 경제에 피해를 가장 적게 주면서 이민에 대한 정치적 반발을 가장 잘 누그러뜨릴 정책은 무엇일까요? 라시나는 영국에서 사회주택 신청자가 해당 지역과 연고가 있는지 확인하는 제도부터 미국에서 주 정부 대학 장학금을 지급할 때 그 주 학생을 우대하는 제도까지 다양한 예를 듭니다. 역사적으로 정부는 공공시설과 서비스를 유지하면서 노동자의 이동을 허용하기 위해, 우선 국내의 서비스 배분을 제한해 그곳 주민에게 우선권을 줬다고 지적합니다. 이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조치를 흔히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더 열린 정책을 위한 대가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효과가 좋은지 꼭 알고 싶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지역 주민을 우선하는 원칙이 이민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민들이 누가 합류할지를 자기들이 정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먼 수도에서 내린 결정보다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난민을 위한 지역사회 후원 제도부터 받아들일 이민자를 직접 고르는 캐나다의 주와 마을까지 다양한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라시나는 정치적 분권이 이주를 억제하는 경향이 있으며, 양쪽의 활동가 모두 누가 그곳 사람인지를 둘러싼 다툼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부 단계로 옮기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어느 효과가 더 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택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역 결정권을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로라 푸트와 제프 퐁은 님비의 비용을 대부분 다른 곳에서 투표하는 사람들이 떠안으므로, 주법이 지방의 토지 이용 규제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앤드루 벌리슨은 더 신중합니다. 주법이 지방 규정보다 고치기 어려워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개혁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포스터와 조지프 워런도 이의를 제기합니다. 상위법이 지역의 결정을 무효로 하면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쉽고, 주민이 새 주택 건설을 두고 투표하며 이익을 나눌 수 있게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민 정책에도 비슷한 두 접근이 있습니다. 지방이 새로 오는 사람을 배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국가 규정과, 원하는 지역사회가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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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이 책에 대해 더 큰 비판거리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좋은 책입니다! 이제는 그곳 주민이라는 지위에 어느 정도 특권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세계 거의 어디에나 퍼져 있고, 조만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학자와 활동가 모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고 확신합니다. 다만 그곳 주민의 권리에 대한 이런 믿음을 민족주의와 견준 책의 더 논쟁적인 주장에는 조금 덜 설득됐습니다. 라시나의 자료를 보면 원론적으로는 사람들이 그곳 주민을 우대하는 일을 자국민을 우대하는 일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두 소속감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다른 질문입니다.3
철저한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드물듯 철저한 고전적 민족주의자도 드문 듯합니다. 그래도 제가 자료를 읽기로는 사람은 지역 정체성보다 자기 나라를 위해 죽고 사람을 죽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국가에 사람을 징집해 그런 상황에 놓이게 할 장치가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지역 차원에서보다 국가 차원에서 훨씬 더 협력할 의욕을 보이고, 국가 운영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도 더 쉽게 받아들입니다. 이 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라시나가 그곳 주민의 권리를 뒷받침하는 데 쓰는 증거도 대부분 국내에서 일자리와 공적 혜택을 어떻게 배분할지를 물은 문항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이민 정책은 거의 언제나 국가 차원에서 결정됩니다. 제 실험에서 영국 사람들은 이민 정책이 자기 지역에 무엇을 가져다주느냐보다 영국 전체에 무엇을 가져다주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다만 앞서 말했듯 시민권을 그곳 사람이라는 지위의 국가 차원의 독자적인 형태로 보면 라시나의 견해와 제 견해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민과 주택을 연구하거나 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Strangers and Settlers를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저처럼 이민도 주택도 늘기를 바라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라시나의 말처럼 거의 어디서나 그곳 주민이 자신들의 우선권을 기대한다면, 이민과 풍부한 주택 공급에 지지를 얻으려면 그 우선순위가 유지되도록 정책을 설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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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에는 여전히 이런 우려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노동시장 내 위치가 이민에 대한 태도를 거의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저도 숙련 이민에 관해 이 점을 다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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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여행에 대한 비자 면제를 어느 나라에 적용할지도 같은 원리로 정해집니다. 국가는 안보와 세수, 지역 주민이 누리는 자원에 대한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경우에만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합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국가가 없는 곳의 사람들이 여행하기 유독 어려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 나라 정부가 인터폴 같은 공동 감시 체계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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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적이라는 평판이 있는 서구 국가에는 이 말이 특히 들어맞을 수 있습니다. 더 “집단주의적”인 문화에 비해 사회 전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가까운 사람에 대한 의무는 덜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
